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 산 (문단 편집) == 죽음과 미얀마의 분열 == 독립을 쟁취하기 전인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의 형[* [[아웅 산 수 치]]에게는 [[삼촌|큰아버지]].]을 포함한 7인의 장관들과 함께 양곤 사무국 건물에서 임시 내각 회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아침에 군복을 입고 톰슨과 스텐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4명의 괴한이 지프를 타고 사무국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호원들을 죽이고 회의장으로 난입, 총기를 난사하였다. 아웅 산을 비롯한 5명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이후 영국 식민정부는 임시 내각의 총리였던 우 소[* 친영 매국노. 미얀마의 독립을 반대하였다.]를 비롯한 8명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체포, 버마 임시 대법원에 이들의 재판권을 넘겨주었다. 우 소는 억울함을 항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명 모두 이듬해에 처형하였다. 그의 암살로 버마의 운명은 [[독립]] 이후부터 삐걱댔고, 이후 [[버마족]]과 [[카렌]], 카친, [[샨]], 친, 카미, 아라칸,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들과 이념이 다른 정당간 [[내전]]이 끊이지 않게 되며,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혼란한 빈국으로 [[추락]]하고 만다. 독립 이후 버마의 굴곡진 역사에서 민족, 종교, 이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버마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아웅 산의 죽음은 제일 안타까운 순간. 만일 그가 죽지 않고 버마의 초대 [[대통령]]이나 혹은 초대 [[총리]]가 되었더라면 적어도 지금 같은 내전, [[쿠데타]]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웅산은 버마족 출신이었지만 카렌, 샨, 카친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관대하였으며, 팡롱 협약이라는 미얀마 내 소수종족들의 자치와 권익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었다. 동남아시아의 국부들 중에서도 유난히 기구한 운명인데 다른 국부들과 달리 집권은 커녕, 반대파에 의해 독립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것도 모자라, 죽은지 36년뒤에 어느 [[북한]]의 [[김정일]]에 의해 자신의 묘소를 폭파되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까지 당했다. 거기에 본인 사후에 [[아웅 산 수 치|딸]]은 갖은 고생끝에 민주화 운동으로 집권했으나 [[2021년 미얀마 쿠데타|미얀마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다시 감금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버마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건 물론이거니와 '''버마 통합'''을 실현하려던 인물이었기에, 현 미얀마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군부조차도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그래서 딸인 [[아웅 산 수 치]]가 30년 넘게 미얀마 군부에게 대항하며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 시기에 겪은 탄압이 '''가택 연금'''으로 끝났던 것.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군부가 이끄는 독재 정권이라 한들 아웅 산의 후손을 함부로 탄압했다가는 '''그날로 정권이 무너질 수 있을만큼''' 아웅 산의 위상 자체가 [[최고존엄]]인 건데, 심지어 미국의 한 언론인이 미얀마에 취재 목적으로 입국해놓고는 아웅 산 수 치의 자택에 몰래 찾아가 인터뷰를 한 게 탄로나서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아 공항으로 압송될 때 어느 여경이[* 미얀마에서는 경찰도 행정부의 내무부 산하 기관이 아니라 군 산하 기관이다.] '''작은 목소리로 아웅 산 수 치의 안부를 물어봤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